◎ 경제기타/금융

은행서 예금 1조원 썰물처럼 빠졌다… 고금리시대 新풍경

그랜드k 2022. 11. 7. 11:11

발 빨라진 ‘금리 노마드족’
한달에 예금 24만건 중도해지
예적금 환승 계산 프로그램 인기
금리 인상 뒤늦게 한 은행에선
예금 1조원 썰물처럼 빠지기도

입력 2022.11.07 04:43
 
 
 
 
 

주부 한모(41)씨는 최근 두 달 새 정기예금을 두 번이나 깨고 새로운 상품에 가입했다. 더 높은 금리를 받기 위해서다. 한씨는 지난 9월 초 여윳돈 2000만원을 A은행의 연 3.5% 1년 정기예금에 넣었는데, 10월 중순 해당 상품 금리가 연 4.5%로 확 오르자 첫 번째 환승을 했다. A은행 앱에 들어가 터치 몇 번만 하면 되니 간단했다. 세후 이자는 59만원에서 76만원으로 늘었다.

보름도 안 돼 연 6.5% 저축은행 정기예금이 나오자 2차 환승을 했다. 세후 이자로 110만원을 받을 수 있는 금리였다. 한씨는 “늘어난 이자를 생각하면 뿌듯하긴 한데, 이렇게 자꾸 예금을 깼다가 다시 드니 만기가 미뤄져 그 돈을 손에 쥘 날이 멀어지고 있다”고 했다.

자고 나면 오르는 금리로 인해 한씨처럼 0.1%포인트라도 더 높은 금리를 찾아 예·적금 갈아타기(환승)를 하는 ‘금리 노마드(유목민)’족이 늘고 있다. 지난 9월 한 달간 KB국민·신한·하나·우리·NH농협은행 등 5대 은행의 정기예금 중도 해지 건수는 24만건이었는데, 10월엔 불과 3주도 안 돼 이를 넘어섰다. 지난달 말, 단 사흘 만에 1조원을 모았던 OK저축은행의 연 6.5% 정기예금(1년) 가입액 중 3000억원은 기존 OK저축은행 고객의 상품 갈아타기였다. 온라인에서는 몇 가지 금액과 이율 등 조건을 써넣으면 예·적금 갈아타기 시 이율 차이를 자동으로 계산할 수 있는 ‘예적금 환승 계산기’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고 있다.

◇요동치는 은행 수신 잔고

금리 노마드의 대이동이 일어나면서 은행들의 수신 잔고는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출렁이고 있다. 카카오뱅크의 경우 9월엔 수신 잔액이 1조3806억원 늘었는데 10월에는 1조5759억원이나 줄었다. 1조원대 자금이 밀물처럼 들어왔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것이다. 10월 초 5대 은행이 일제히 정기예금 금리를 4%대 중반으로 끌어올리자 금리가 연 3.3%에 불과했던 카카오뱅크 정기예금에서 돈이 빠져나간 것으로 보인다.

반면 경쟁사인 케이뱅크는 한국은행의 빅스텝(기준금리 0.5%포인트 인상)보다 선제적으로 금리 인상에 나서 10월 수신 잔액을 8000억원 늘렸다. 지난달 7일 케이뱅크가 정기예금 금리를 1금융권 중 가장 높은 연 4.6%로 인상하자 일주일 새 신규 계좌 수가 직전 1주일에 비해 10배 이상 늘었다. 또 지난달 5일 파킹통장 금리를 연 2.3%에서 2.5%로 올려 인터넷은행 중 1위가 됐을 때에도 1주일 새 신규 개설 계좌가 직전 1주일에 비해 3배 가까이 증가했다.

 

은행권도 정기예금 금리를 작년의 두 배 수준으로 올리면서 뭉칫돈을 대거 흡수하고 있다. 10월 5대 은행 정기예금 잔액은 808조2000억원으로 한 달 새 47조원이나 불었다. 역대 최대 증가폭이다. 이 여파로 지난달 초 시중은행과 저축은행 정기예금의 평균 금리 격차가 1%포인트 미만으로 좁혀지면서 일부 저축은행에선 하루에 몇 백억원씩 돈이 빠져나갔다. 미국의 금리 인상 이후 신흥국에서 외국인 자금이 유출되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 국내 은행과 저축은행 업계에서 벌어진 것이다. 이에 저축은행들은 급격히 금리를 올려 고객 붙잡기에 나섰다. 이달 초 저축은행 1년 만기 정기예금 평균 금리는 연 5.42%로 한 달 전(3.85%)에 비해 1.57%포인트나 올랐다.

◇1·2금융권 경계도 무너져

예·적금 갈아타기는 1·2금융권을 가리지 않고 있다. 더 높은 금리를 따라 은행에서 다른 은행으로, 은행에서 저축은행으로 돈을 옮긴다. 저축은행이나 신협, 새마을금고 등에선 연 6%대 예금, 10%대 적금을 쉽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. 지난달 말 나온 신협의 연 10% 적금은 출시 당일 완판됐다. 금융권 관계자는 “10년 전 저축은행 사태를 직접 겪어보지 않은 20~30대 젊은 층은 저축은행에 대한 거부감이나 편견이 기성세대보다 덜하다”며 “예금자 보호가 되는 5000만원까지는 금융사 브랜드를 떠나 금리가 더 높은 곳으로 움직이는 경향이 강해졌다”고 했다.

디지털 기술의 발전도 금리 노마드족이 움직이기 좋은 환경을 만들었다. 금융사 계좌를 한데 연결해 놓는 오픈뱅킹으로 손쉽게 돈을 옮길 수 있는데, 현재 전 국민의 60%에 해당하는 3000만명이 이용하고 있다. 게다가 코로나를 겪으며 1·2금융권 모두 비대면 금융 거래를 위해 모바일 앱을 고도화했다. 손품 몇 번이면 간편하게 예적금을 환승할 수 있게 된 것이다.